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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쥬스’가 ‘주스’인 이유

‘텔레비전’ ‘주스’ ‘초콜릿’이 고유어가 아닌 외래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외국에서 들어온 말로 국어처럼 쓰이는 대표적인 단어들이다. ‘웰컴(welcome)’ ‘나이스(nice)’ 같은 외국어와는 구별된다.   문제는 헷갈리는 표기법이다. ‘텔레비젼’ ‘쥬스’ ‘쵸콜릿’으로 쓰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들 표기가 원음에 더 가깝게 느껴져서라고 주장하지만 ‘텔레비전’ ‘주스’ ‘초콜릿’으로 적어야 한다. 외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표기가 현지 발음에 더 가까운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한글 맞춤법이나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처럼 외래어에도 표기법이 있어서다.   외래어 표기법에선 ‘ㅈ’ ‘ㅊ’에 이중 모음이 결합한 ‘쟈, 져, 죠, 쥬’ ‘챠, 쳐, 쵸, 츄’를 쓰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자, 저, 조, 주’ ‘차, 처, 초, 추’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말에선 구개음(입천장소리)인 ‘ㅈ’ ‘ㅊ’ 뒤에서는 ‘ㅑ, ㅕ, ㅛ, ㅠ’가 발음상 ‘ㅏ, ㅓ, ㅗ, ㅜ’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리가 구별 안 되니 ‘져’와 ‘저’, ‘쥬’와 ‘주’, ‘쵸’와 ‘초’ 등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런 이유로 텔레비젼은 텔레비전, 쥬스는 주스, 쵸콜릿은 초콜릿으로 표기한다. 외국어와 달리 외래어는 원음에 기초를 두되 우리말의 발음 체계를 반영하고 있다.   발음상 구별되지도 않는데 고유어에선 ‘ㅈ’ ‘ㅊ’ 뒤에 이중 모음이 결합한 형태인 ‘져’나 ‘쳐’ 등을 쓰는 이유가 뭘까?   “문턱에 걸려 넘어저서 다첬다”를 “문턱에 걸려 넘어져서 다쳤다”로 사용하는 것은 ‘넘어지-+-어서’ ‘다치-+-었-+-다’가 줄어든 형태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넘어져서’는 ‘넘어지어서’, ‘다쳤다’는 ‘다치었다’의 준말이라는 문법적 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표기다. 외래어는 이러한 문법적 관계로 이뤄지는 게 아니므로 ‘ㅈ’ ‘ㅊ’ 뒤에 이중 모음이 결합한 형태를 굳이 쓸 필요가 없다. ‘아마츄어, 스케쥴, 챠트’는 각각 ‘아마추어, 스케줄, 차트’로 적어야 한다.  우리말 바루기 쥬스 주스 외래어 표기법 텔레비전 쥬스 주스 쵸콜릿

2025-01-23

[재정칼럼] 새해와 낙관적인 마음

2024년 미국 주식시장은 새로운 최고 기록을 세우며 23% 상승했다. 2023년에는 24%로 상승했다. 2년 연속 20% 이상 상승은 1997년과 1998년 이후 처음이다. 이런 이유로 올해 백만장자가 무수히 탄생했다. 재정칼럼 800편 이상을 쓰면서 주식 투자의 중요함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나의 돈이 주식시장이 투자되어 있지 않으면 이런 놀라운 주식시장의 수익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최근 주위에 주식 투자로 큰돈을 벌었다는 투자자를 자주 접한다. 나만 손해를 보는 것 같아 주식 투자에 귀를 기울인다. 주식시장의 움직임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의견은 크게 두 가지다. 주식시장 가격이 많이 상승했고, 물가 안정은 시간이 더 필요하고, 여러 곳의 전쟁과 분쟁으로 미래가 불확실하기에 시장이 급락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이와 반면 새로운 정부는 기업과 개인의 세금을 줄이고, 기업 경영에 부담되는 여러 규제를 완화하고, 정부 규모를 축소하는 정책은 주식시장에 긍정적으로 반영되어 주식시장이 상승할 것이라는 의견이다.   피터 린치는 피델리티의 마젤란 펀드를 13년간(1977~1990) 운영했다. 그 기간 마젤란은 2700% 이상 상승했고 그는 1990년에 46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그가 한 방송에서 대담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주식시장은 오르고 내림을 반복한다. 10% 이상 하락은 2년에 한 번씩 발생하고 약 6년에 한 번씩 큰 폭으로 폭락한다. 그러나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에게 그 사실을 말할 이유가 전혀 없다.”   투자를 망설이는 투자자에게 피델리티에서 조사한 내용 하나를 소개한다. 1980년 1월부터 2022년 12월까지 주식시장(S&P 500)에 1만 달러를 투자한 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면 100만8만2309달러로 불어난다.     같은 기간 동안 주식시장이 가장 많이 상승했던 단 5일 동안 나의 돈이 투자되어 있지 않다면 불어난 돈은 67만1051달러로 줄어든다. 상승했던 10일 동안 투자되어 있지 않으면 48만3336달러로 절반보다 적어진다.     미래를 예측하는 어느 전문가가 상승했던 5일 그리고 10일 언제인지 예측할 수 있겠는가.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 참고로 주식시장이 상승했던 50일 동안 투자되어 있지 않으면 불어난 돈은 단 7만6104달러에 불과하다.   주식시장 투자에는 그때 그 시점에 항상 염려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20세기에 두 번의 세계전쟁, 한국전쟁, 등이 있었고 12번 이상의 침체기(Recession), 오일 파동, 등이 있었지만 다우 존스는 66에서 1만1497로 상승했다. 21세기는 금융위기도 경험하고 미국 신용등급 하락, 3번의 경기 침체, 2번의 50% 이상 폭락, 전 세계를 폐쇄한 팬데믹을 경험했지만, 다우 존스는 4만 이상으로 상승했다.   부자는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마음을 가지고 팬데믹과 같은 어려운 상황을 좋은 기회란 생각하며 투자한다. 가난한 사람은 투자할 자금도 많지 않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비관적인 마음 때문에 투자하지 못한다.   지난 10년 주식시장은 연평균은 13.3%이다. 투자한 원금이 1만 달러였다면 약 3만5000달러로 3배 이상 불어났다. 미래의 주식시장 수익률을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오랜 역사는 우리에게 기준치를 제시한다. 오랜 기간 주식투자수익률은 분명 물가 상승보다는 높았다는 사실이다. 이래서 투자의 필요성을 강조해 온 것이다.   제대로 하는 투자는 현시점에 의해서 투자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를 기대하며 투자하는 것이다. 2025년 새해를 시작하며 독자 여러분은 물론 사랑하는 아이들에게도 투자의 필요성을 알려주어 우리 모두 백만장자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이명덕 / 재정학 박사재정칼럼 새해 낙관 주식시장 투자 기간 주식투자수익률 주식시장 수익률

2025-01-23

[문화산책] 보라색 동그라미 태극기

집안 환경 탓으로 우리 아이들은 어린 시절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림 그리는 엄마 옆에서 놀면서 자연스럽게 붓을 잡아 휘두른 것이다.   두 살 남짓 무렵 아이들의 그림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좋았다. 아무런 꾸밈도 거침도 생각도 없는 그림…. 첫 아이의 그림은 엄마 개인전 때, 한구석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 전시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다. 문제는 그들이 성장한 후에도 예술가로 남을 수 있는가이다”라는 피카소의 말이 떠오르곤 했다.   그 무렵, 어느 날 문득 태극기가 눈에 띄기에 아이에게 주며 이걸 그려보라고 한 적이 있다. 아이가 태극기가 무엇인지, 거기에 어떤 심오한 뜻이 담겨있는지 알 리 없고, 나도 그냥 호기심에 그려보라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그린 태극기는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다. 한가운데 보라색 동그라미가 크고 당차게 자리 잡고 있고, 그 네 주위를 시커먼 작대기가 감싸고 있는 작품(?)이었다. 보라색은 붉은색과 푸른색이 자유분방하게 뒤섞이며 만들어낸 색깔이었다.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 이것은 통일의 모습 아닌가! 붉은색과 푸른색이 온전히 하나가 된!”   오랜 옛날의 그 장면이 불쑥 떠오른 것은 아마도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현실 때문일 것이다. 오른쪽 왼쪽으로 갈라지고 쪼개지고 부서져, 사분오열 서로 원수가 되어 핏발 선 싸움박질에 여념 없는 위험한 현실….   사람마다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다양한 생각과 이념이 자연스럽게 부딪치고 어울리며 대화를 나누고 토론하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 건강한 민주사회다. 내 생각만 옳고 나와 다른 생각을 한 자는 적이요 원수라는 식의 아집은 독이다.   혹시라도 말이 잘 안 통해서 싸움이 일어나고 대립이 심각해질 때, 중재에 나서라고 존재하는 것이 정치다. 정치는 타협과 조정, 화합의 예술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정치가들이 앞장서서 국민 갈라치기를 선동하는 망국적 판국이 되풀이되고 있다. 우리 편 아니면 모두 적이니 죽여없애야 한다. 이건 도무지 사람의 논리가 아니다. 정치는 격투기가 아니다.   오죽하면, 대중가수의 한마디 발언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 지경이다. 자초지종을 간추리면 이렇다. 물론,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가수 나훈아가 자신의 은퇴공연에서 말했다. “그만두는 마당에 아무 소리 안 하려고 했는데… 왼쪽이 오른쪽을 보고 잘못했다고 생난리다. (왼쪽 팔을 가리키며) 니는 잘했나?”   더불어민주당은 당연히 발끈했고, 나훈아도 물러서지 않고 거친 말로 맞받아쳤다.     “나보고 뭐라고 하는 저것들, 자기 일이나 똑바로 하라. 어디 어른이 이야기하는데 XX들을 하고 있느냐. 안 그래도 작은 땅에 선거할 때 보면 한쪽은 벌겋고, 한쪽은 퍼렇고 미친 짓을 하고 있다.”   그러자 이번에는 진보 경향의 가수, 배우 등 연예인들이 ‘어른과 노인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말로 비난하고 나섰다고 한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시시비비를 따지고 싶지 않다. 세상일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갈라칠 수 있는가? 부질없다. 그저 한 가지만 묻고 싶다. 보수와 진보는 원수지간이고, 좌와 우는 정말 그렇게 다른 적인가? 간절한 마음으로 옛 어른들의 가르침을 되새긴다. ‘대동소이(大同小異), 화이부동(和而不同)’   멀리 바다 건너에서 그런 참담한 장면을 바라보면서, 아이가 그린 태극기의 보라색 동그라미를 떠올리니 처량하고 서글프기 한이 없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동그라미 보라색 보라색 동그라미 한가운데 보라색 거침도 생각

2025-01-23

[기자의 눈] 디지털 시대, 뉴스 객관성을 찾아서

21세기에 접어들며 뉴스 소비 방식은 빠르게 변화했다. 디지털 기기가 뉴스 소비의 중심이 되면서 정보 접근 경로와 형태가 더욱 다양해졌다.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86%가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를 통해 뉴스를 소비하고 있다.     디지털 전환은 뉴스 소비를 더욱 개인화하며, 뉴스의 객관성과 신뢰성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제기하고 있다.   뉴스는 과거에도 객관적이지 않았다. 신문과 방송 등 전통적 언론사는 정치적 성향과 가치관에 따라 보도의 방향과 워딩을 조정하며 각 언론사들의 관점을 드러냈다.     같은 사건이라도 접근 방식에 따라 강조점이 바뀌면서 독자가 받아들이는 메시지는 크게 달라졌다. 이러한 편향성은 오늘날 디지털 플랫폼으로 인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디지털 플랫폼은 뉴스 소비의 개인화를 가속화했다. 퓨 리서치 센터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54%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뉴스를 접한다고 답했다. 지난해 틱톡 사용자 중 52%는 뉴스를 소비한다고 밝혔으며, 이는 지난 2020년의 22%에서 크게 증가한 수치다.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관심사에 맞춘 뉴스를 제공해 정보 소비를 편리하게는 하지만 더 편향적이고 선택의 폭 역시 제한한다. 짧고 빠른 정보 전달에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깊이 있는 이해보다는 단편적 정보 소비를 부추긴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의 선택은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깊이 연결돼 있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공화당 지지자들은 페이스북과 유튜브, 트루스 소셜과 럼블 같은 플랫폼 사용자중에서 높은 비율을 보인다.     반면 민주당 지지자들은 인스타그램, 틱톡, 왓츠앱(WhatsApp)을 주요 뉴스 소비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플랫폼과 정치적 성향의 결합은 정보 소비에서 명확한 편향성을 드러낸다.   뉴스를 비판적으로 소비하려면 출처와 의도를 세심히 살피는 노력이 필요하다.     디지털 플랫폼은 정보 접근성을 확대했지만, 정보의 신뢰성과 정확성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뉴스는 개인화된 경험을 제공하지만, 반대되는 관점을 접할 기회를 줄이며 정보 균형을 해칠 가능성을 높인다.   AI 기술은 뉴스 소비의 객관성을 높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AI 역시 편향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설계되며, 이를 만든 개발자의 가치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AI가 생성한 뉴스는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는 여전히 주관성이 개입될 가능성이 크다. 객관성은 완벽히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일지 모르지만, 이를 향한 노력은 필수적이다.   뉴스 소비는 세대별로도 다른 경로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18~29세 연령층의 91%는 디지털 기기를 통해 뉴스를 소비하는 반면, 65세 이상의 86%는 TV를 통해 뉴스를 소비한다.     이러한 차이는 세대별 정보 소비 경험이 크게 다르며, 각 세대가 접근하는 정보의 성격도 다름을 보여준다. 객관성을 추구하려면 디지털과 전통 매체의 뉴스들을 교차 검토하거나, 다양한 정치적 성향의 매체를 적극적으로 탐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정보의 편향성을 인식하고 균형 잡힌 시각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다.   객관성은 단순히 많은 뉴스를 접하는 것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정보를 소비하고 해석하며 스스로 판단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디지털 플랫폼은 정보 접근성을 확대했지만, 동시에 정보 과부하와 신뢰성 문제라는 새로운 도전을 가져왔다.     객관성에 완전히 도달할 수는 없더라도 비판적 사고와 책임 있는 정보 소비를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정보의 편향성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오늘날 뉴스 소비자들에게 필수적인 과제다. 정윤재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디지털 객관성 정보 접근성 뉴스 소비 디지털 플랫폼

2025-01-23

[열린광장] ‘오 솔레 미오’가 열어준 길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지만 미국에서 학위도 땄고 목회도 미국에서 한 미국 시민이다. 20여 년의 목회를 끝내고 명예목사의 신분으로 글을 쓰면서 노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어렸을 적 시인이 되려했다던 허준이 교수가 전공분야가 아주 다른 수학 노벨상을 받은 글을 읽고 젊은 허교수의 글이 나로 하여금 내가 젊었을 때 겪은 일의 한 가닥을 글로 쓸 마음을 먹게 하였다.   6. 25 한국전이 일어난 뒤 서울의 모든 중고등학교가 휴교했을 때였다. 전국 중고등학교 음악경연대회가 국제오페라협회 주최로 배재학당 강당에서 열렸다.     나는 테너 파트로 노래 부르기로 했는데 대회가 열리는 날에 반주 교사가 나타나질 않았다. 할 수 없이 노래부르길 단념해야겠다 싶었다. 그러다 다른 참가자들이 노래를 잘못 부르는 데 화가 난 나머지 무턱대고 강단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맨 나중에 노래 부른 학생의 반주자에게 반주를 부탁했고 그 반주로 지정곡 ‘가고파’와 자유곡 ‘오 솔레 미오’를 불렀다. 청중들은 기립 박수를 보냈고 반주자에게 고맙다는 눈인사를 하고 강당을 내려왔다.   심사발표가 나왔다. 다섯 학생이 합격했다. 넷은 여학생이었고 나머지 한 명이 나였다. 이 경연대회에 합격한 학생들은 서울 음대에 응시하면 실기는 면제받는다는 말을 들었다. 상장과 놋그릇 한 벌을 상으로 받았다.   이듬해, 나는 서울대 음대에 진학하려고 음악 교사에게 입학추천서를 부탁했다. 그랬더니 “경중아, 음악을 전공해 봤자 나처럼 음악선생밖에 더 되겠니. 그러지 말고 더 좋은 대학에 가서 공부해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는 말이 돌아왔다.   성악가를 꿈꾸는 내게 음악대학에 가지 말라니 그럼 무얼 전공하란 말인가. 할 수 없이 기독교 대학인 연희(연세)대학교 입학요강을 살펴봤다. 그러다가 깜짝 놀랐다. 이 대학에 박태준 박사가 음악교수로 재직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입학하면 신학과 더불어 음악도 공부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단 말인가. 대학에 입학한 뒤 박 박사로부터 화성학을 비롯한 과목을 배웠음은 물론이요, 합창지휘를 공부하기 위해 박 박사가 이끄는 오라토리오 합창단에 들어가 합창지휘도 공부했다. 뿐만 아니라 주일에는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로 오랫동안 봉사했다.     서울 음대로 나의 삶의 길이 놓여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길이 놓여져 있는 연희 신대로 나는 걸어가게 된 것이다. 세상에서 자기가 가고 싶은 삶의 길을 걸어가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 속담에 ‘길로 가라면 메로 간다’는 말이 있다. 일마다 엇나가기만 하는 사람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그러지 않으려면 이미 놓여져 있는 길을 따라 순리대로 걸어가야 하는데 이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길이 열려야’ 한다. 실력과 운이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만 놓여져 있는 길로 걸어갈 수 있다.   경연대회에서 “나의 햇님! 내게 비쳐다오!(오 솔레 미오, 스탄 후롬 테아 테)”를 불렀던 내게 햇님이 열어준 길은 아마도 목회자가 아니었을까. 운경중 / 연세목회자회 증경회장열린광장 서울 음대로 대학교 입학요강 서울대 음대

2025-01-23

[독자 마당] 아주 보통의 하루

새마음으로 맞이하는 또 한 번의 새해 을사년! 새해를 수십 번 맞으면서도 새해 결심은 한 번도 이루지 못한 채 늘 작심삼일로 끝나곤 했다.     연령에 따른 세월의 속도를 자동차주행 속도에 비교하기도 한다. 90대는 90마일로 달린다고 하니, 종착지가 다가옴을 아쉬워할 수밖에 없다. 2025년은 푸른 뱀의 해다. 푸른 뱀은 지혜 풍요 치유와 재탄생을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하니 지혜와 성장의 기운이 많이 깃들기를 바라면서 모든 가정에 복이 가득하길 바라본다.   새해를 맞아 결심을 적기 위해 새 종이를 펼쳐놓는다. 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창한 결심은 접어두고 남들 눈에는 대수롭지 않을지 모르나 내 나름대로 또 한번 적어 본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인생도 출생과 함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오래 살다 보니 사랑하는 남편과 친구들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봤다. 삶과 죽음은 무관하지 않다. 죽음을 겪으며 매순간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죽음의 확실성도 알았다.     인생의 종착지에 다가가는 시점에 웰다잉(Well-Dying) 연습을 빼놓을 순 없다. 인생 즐거움을 아는 순간부터 더욱 절실해 지며 삶을 사랑한다면 그만큼 죽음에 대해서도 잘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결코 삶은 무한하지 않으니 말이다.   미래 소비 트렌드 예측서인 ‘트랜드 코리아 2025’는 올해 주요 트렌드 키워드로 ‘아보하’를 선정했다고 한다. ‘아주 보통의 하루’의 줄임말이다. 너무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불행하지도 않은 보통의 무난한 일상을 말한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평온함을 찾으려는 삶의 태도다. 예측 불가능하고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사회의 다양한 갈등 속에 우리들의 바람인 것 같아 나도 함께하려한다.   무지와 교만, 허영과 오판으로 타인을 원망하지 말고 다가오는 순간 순간 감사하며 용서하면서 사랑하고 모든 것을 비우고 내려놓고 떠나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하지만 열정과 의욕까지 잊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도 같이 해본다. “인생에서 늦을 때란 없다”고 하니 말이다.   임순·LA독자 마당 보통 새해 결심 새해 을사년 자동차주행 속도

2025-01-23

[커뮤니티 액션] 이민국 단속에 대처하는 방법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리고 바로 국경 비상사태 선포 등 대대적인 이민자 단속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이에 맞서 민권센터와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는 한인 서류미비자 보호를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이민자 단속 대처 전국 24시간 핫라인(1-844-500-3222)을 만들어 긴급 전화를 받는다. 이민자 권리 지침도 만들어 배포하고 있다. 미국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이민 신분과 관계없이 헌법에 따라 기본적인 권리를 보호받는다. 서류미비 이민자도 포함된다. 특히 이민세관단속국(ICE) 또는 기타 법 집행 기관을 대할 때 자신의 권리를 이해하고 행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첫째, 침묵할 권리가 있다. 이민 단속 담당자와 대화해야 할 의무가 없다. “나는 침묵할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말할 수 있다. 출생지나 미국 입국 경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야 할 의무도 없다.   둘째, 집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거부할 권리가 있다. ICE는 판사가 서명한 영장이 없으면 집에 들어올 수 없다. 창문을 통해 영장을 보여달라고 하거나 문 아래로 밀어 넣으라고 요청해야 한다. 영장에 본인의 정확한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함부로 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 문을 열면 질문에 답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셋째, 변호사와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 ICE가 질문하면 “변호사와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질문을 받을 때 변호사의 동석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변호사와 상의하지 않고 어떤 문서에도 서명하면 안 된다. ICE는 권리를 포기하거나 추방에 동의하도록 강요할 수 있다. 서명하기 전에 문서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했는지 확인해야 한다.   ICE가 일하는 곳으로 쳐들어올 수도 있다. 이른바 ‘기습단속’으로 고용주에게 사전 경고 없이 사업장을 방문하는 것이다. 이때에도 직원들은 위와 같은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그리고 고용주는 직원이 동의할 경우 ICE 요원의 직무 수행 과정을 동영상으로 촬영, 녹음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권리 침해가 있을 경우 이후 밝혀낼 수 있다.   트럼프 1기 집권(2017~2020) 때 서류미비자 150만 명이 추방됐다. 하지만 이번엔 규모가 더 커질 전망이다. 그리고 트럼프는 미국에서 태어난 서류미비자 자녀들의 자동 시민권 취득을 거부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18개주 검찰이 즉각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트럼프의 행정명령이 위헌으로 판명되지 않으면 해마다 15만 명의 아이들이 서류미비자로 태어난다. 이미 어릴 때 부모의 손을 잡고 미국에 왔다가 서류미비자가 된 청소년과 청년들이 360만 명이다.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어릴 때부터 미국인으로 알고 자랐는데 서류미비자로 살아가야 하는 아이와 젊은이들이 트럼프 임기가 끝나기 전에 400만 명을 넘게 될 것이다. 현 1100만 서류미비자의 3분의 1이 넘는다. 서류미비자는 계속 늘어나고 추방은 끝없이 이어져야 한다. 트럼프도 알고 있다. 1100만 서류미비자를 모두 추방하면 미국 경제가 망한다는 것을. 그러니 계속 ‘이민자 때리기’로 정치적 이득을 얻는 것일 뿐이다. 한국의 ‘지역감정’과 같이 이민자는 정치에 이용당하는 희생양이다. 그래서 참을 수 없다. 이민자도 사람이다! 김갑송 / 민권센터·미주한인평화재단 국장커뮤니티 액션 이민국 단속 이민자 권리 이민자 단속 이민국 단속

2025-01-23

[삶과 믿음] 이 촛불이 폭풍에 꺼지지 않기를

아이티에 있는 우리 딸 위슬린은 대학 1학년에 다닌다. 15년 전 아이티 대지진 직후 여자아이들만 있는 고아원인 하우스 오브 홉(House of Hope)에서 다섯 살의 위슬린을 만나서 입양을 계획했다가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이후 아이를 고아원에 둔 채로 딸 삼아 뒷바라지하며 키웠다. 사춘기를 심하게 보내기도 했고, 공부를 잘하던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대학 입학에 꼭 필요한 자격 시험인 바칼로레아에 떨어져서 상심하기도 했다. 갱들이 길을 비운 틈을 타 오랜만에 만난 아이는 엄마인 내 아내를 안고 펑펑 울더니 두 번째 시험을 봐서 바칼로레아를 통과하고 수도 포토프린스따바에 있는 아리스티드 대학교 간호학부에 진학했다.   아이티를 생각하면, 아이가 이만큼 자란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감사하게도 아이가 자란 하우스 오브 홉은 고아원 중에서는 가장 윤택하게 운영이 되는 곳이어서, 아이들은 밥을 자신이 먹고 싶은 만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내가 아는 한 마음껏 밥을 먹을 수 있는 고아원은 이곳이 유일하다). 아이마다 침대가 하나씩 배정되고, 하루에 한 번씩 샤워할 수 있는 흔치 않은 환경을 갖춘 곳이다.   위슬린은 아주 어려서는 비행기 승무원이 되고 싶다고도 했고, 언젠가는 뷰티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고도 했다. 현실은 어려웠지만 아이는 미래를 꿈꾸며 나이가 들더니 간호사가 되겠다고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무엇이든지 라이센스가 있는 직업이 좋다고 늘 강조하던 우리 부부의 주장이 영향을 미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아이는 대학 진학을 통해 꿈에 한 발 더 다가섰다.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간호학과 학생 유니폼과 학교 다닐 준비를 다 했는데, 학교 다니는 길이 걱정이었다. 미국대사관 근처에 있는 학교는 갱단이 활개를 치기 전에도 늘 폭력시위가 난무하는 지역이었다. 고아원에서 2.5km 되는 가까운 거리에 학교가 있지만 통학하는 길은 늘 아슬아슬하다. 학교는 다행히 지난 가을 며칠씩 문을 닫은 외에는 계속 수업하고 있는데 우리는 매일 아이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고, 자주 왓츠앱으로 안부를 주고받는다.   위슬린은, 개인적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처음으로 정식 대학에 보낸 아이다. 그동안 고아원에서 자라나 간호학원이나 기술학교 같은 곳을 다닌 아이들은 있었지만, 바칼로레아를 통과하고 4년제 대학에 처음으로 진학한 것이다. 지금 아이티 현실 가운데 대학을 졸업하고 안 하고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아이들이 남들과 다름없는 교육을 받는 것이 목표이기도 한 우리에게는 그것이 희망이고 꿈이다. 그래서 올해에는 적어도 두 명 이상 아이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라고 질문했다. 나라 전체가 폭력적이고 낙심천만인 상황에서도 아이티 고아원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저마다 가슴에 촛불 하나씩 켜고 꿈을 꾼다. 한편에서는 사람이 죽어가는 폭력적 상황 속에서도 아름다운 삶을 꿈꿀 수 있는 세상을 우리도 그리고 있다. 자라서 무엇인가 되고 싶은 꿈을 품은 촛불을 우리는 폭풍 속 같은 세상에서도 지켜내고 싶다. 이토록 암흑 같은 세상이 거친 숨을 몰아쉴 때도 믿음 안에서 작은 촛불 하나를 애써 지키며 함께 꿈꾸려고 우리는 고아들의 손을 잡고 있다. 조 헨리 / 선교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촛불 폭풍 대학 입학시험 아리스티드 대학교 아이티 고아원

2025-01-23

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 알기 쉬운 회계(3) - 감가상각

감가상각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업체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구입한 ‘자산’을 몇년동안 ‘비용’ 처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산’은 무엇이고 ‘비용’은 무엇인가. 두 가지 모두 회사가 돈을 벌기 위해서 돈을 쓰는 일이다.   기업은 이익을 만들기 위해 이렇게 돈을 쓰는 경우가 많다. 인건비라든지 임대료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런 돈은 해당 기간에 사용되면 그만이다. 다시 말해서 해당 연도에 수입을 벌어들이는데 사용되는 지출이다. 이런 지출이 ‘비용’이다.     반면에, 기업이 건물을 구입한다든지, 기계를 새로 사는 경우에, 건물이나 기계는 회사의 수입을 몇년동안 지속적으로 늘리는데 사용된다. 즉, 건물이나 기계는 단순히 써서 없어지는 돈이 아니라, 기업의 재산가치를 늘려주면서, 동시에 미래의 생산수준을 늘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사용된 지출을 ‘자산’이라고 부른다.   자산을 구입하면 한꺼번에 큰 돈이 들어간다. 하지만 자산은 단기간에 기업의 수입을 늘려주지는 못한다. 앞으로 다가 올 미래의 몇 년 동안 계속해서 수입을 늘리는데 기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큰 돈이 한꺼번에 나갔다고 하더라도 마치 작은 돈이 여러번 나누어서 몇년 동안 나간 것처럼 장부상 처리를 한다. 이것을 ‘감가상각’이라고 부른다.     어떤 회사가 5만불 짜리 기계를 사면 5년 동안 쓸 수있다. 이 기계를 구입하는데 5만 불을 한번에 썼지만, 이 기계로 인해 버는 돈은 앞으로 5년 동안 나누어서 들어 올 것이다.     만일 이 기계 덕분에 회사가 1년에 2만불씩 돈을 번다고 가정해 보자. 현금 기준으로 본다면 첫해에 기계값으로 5만 불을 지출했고 첫 해에 2만 불을 벌어들일테니, 첫 해에는 3만불의 손해가 날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해부터 다섯번째 해까지는, 매년 2만불씩 이익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보는, 회사가 매년 정확히 얼마를 사용해서 얼마를 벌어들였는지를 정확하게 나타내 주고 있지 못하다. 5만 불짜리 기계를 5년 동안 사용할 수 있다면, 이 기계를 1년 동안 사용한 비용을 매년 만불씩만 계산하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비록 5만불이 첫해에 한꺼번에 지출되었지만, 1년에 만불씩 5년동안 나누어서 나간 것처럼 장부상 처리를 하는 것이 ‘감가상각’이다.       감가상각을 해서 다시 계산하면, 매년 이 기계를 통해 2만불씩 수입이 생기고, 비용은 매년 만불씩 나간 것처럼 계산이 된다. 그래서 이 기계를 이용해서 벌어들이는 순수익은 매년 만불씩 나누어 계산된다. 이것이 첫해에 손해가 나고, 두번째 해 이후부터 이익이 나는 것 보다 조금 더 정확한 정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회사는 큰 현금지출이 발생한 해에 비용을 늘려서 당장에 세금을 줄이고 싶어한다. 비용을 늘려 순이익이 줄어들면, 세금이 줄어든다. 기업은 나중에 세금을 더 내더라도 지금 당장 세금을 줄이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요즘같이 경기가 어려운 시기에 정부는 세법에 특별한 감가상각조항을 마련해서 자산을 구입하는 기업에는 추가로 세금혜택을 줌으로써 기업투자를 활성화시키고 있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감가상각 손헌수 기계 덕분 변호사 공인회계사 모두 회사

2025-01-23

[사설] 입 맞춘 듯한 윤 대통령-김용현, 계엄 진상 밝혀야

━ 의원 체포 지시한 적 없다지만 관련자는 “지시받아” ━ 공수처는 기소 요청…검찰, 엇갈리는 진술 규명해야 윤석열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어제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탄핵심판 4차 변론기일에 함께 출석했다. 증인으로 나온 김 전 장관은 이날 윤 대통령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취지의 증언을 했다. ‘국회와 정당 등 모든 정치 활동을 금한다’는 내용이 들어간 비상계엄 포고령은 자신이 과거의 포고령을 참고해 작성한 것이며, 윤 대통령이 꼼꼼하게 검토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비상입법기구 설치가 담긴 쪽지에 대해서도 “문건은 내가 작성했으며 실무자를 통해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줬다”고 답변했다. 그동안 윤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은 포고령과 관련해 일부 입장 차이를 보였으나, 이날은 입을 맞춘 듯이 동일한 주장을 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21일 3차 변론에서 “곽종근 특수전사령관 등에게 계엄 해제 결의를 위해 국회에 모인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고 지시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없다”고 답했다. 김 전 장관 역시 “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다. 포고령 위반 우려가 있는 사람의 동정을 살피라는 뜻에서 명단을 여인형 방첩사령관에게 전달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곽 전 사령관은 지난 22일 국회 내란 혐의 국정조사 특위에 출석해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지시는 분명히 사실”이라고 재확인했다.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도 계엄 직후 윤 대통령에게 “이번에 다 잡아들여서 싹 다 정리하라”는 전화를 받았고, 처음엔 간첩단 사건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방첩사령관의 전화를 받고 정치인 체포라는 것을 알았다고 덧붙였다. 이는 경고성 계엄이라는 윤 대통령 측 주장과는 상반된다. 윤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이 명시적인 지시를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홍 전 차장이나 곽 전 사령관이 이런 일관된 진술을 할 수 있는가. 두 사람이 지시를 잘못 알아들었다는 주장인데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김 전 장관은 이날 “국회의원이 아니라 요원(군인)을 끌어내라는 얘기였다”고 진술했지만 당시 정황으로 보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헌재 재판관들은 비상계엄 선포 당일 국무회의 심의가 제대로 됐는지를 질문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당시 국무회의는 흠결이 있었다”고 말했지만, 김 전 장관은 “국무회의는 짧게 했지만 국무위원들이 들어올 때마다 논의했고 일부는 동의했다”고 답변했다. 엇갈리는 주장이 나오는 부분은 수사와 재판을 통해 규명해야 한다. 어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 대통령을 기소해 달라며 사건을 검찰로 넘겼다. 공수처는 윤 대통령을 구속하기는 했지만 효력이 있는 피의자 신문 조서는 얻어내지 못했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효과적인 수사로 계엄의 실체를 밝혀 기소할 수 있어야 한다. 공수처 수사를 계속 거부했던 윤 대통령도 마땅히 책임 있는 자세로 수사에 응해야 한다.

2025-01-23

[사설] 이진숙 탄핵 기각…정략적 탄핵 남발의 당연한 결과

━ 민주당, 직무정지 후에도 재판관 추천 않고 시간 끌어 ━ “탈이념·탈진영” 외치기 전 국정 발목잡기부터 반성을 헌법재판소가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를 기각했다. 지난해 8월 취임 사흘 만에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탄핵소추를 당한 이 위원장은 5개월 만에 직무에 복귀했다. 예상된 결과다. 민주당은 방송통신위원 2명 체제에서 행해진 이 위원장의 KBS 이사 선임안 의결 등을 문제 삼아 탄핵안을 의결했다. 탄핵소추 이후 민주당은 헌재의 신속한 심리 절차에 협조하기는커녕 오히려 임기만료 재판관 3명의 후임 추천을 방해하는 태도를 취했다. 국회 추천 재판관의 경우 여야가 한 명씩 인선하고 한 명은 여야 합의로 추천하던 관례가 있었으나 이를 무시하고 야당에 두 명의 추천권을 부여할 것을 고집했다. 결과적으로 헌재 사건 심리가 가능한 재판관 7명을 채우지 못해 심리가 기약 없이 미뤄졌다. 이진숙 위원장의 직무정지 상태를 연장해 방통위를 무력화하려는 저의가 읽혔다. 보다 못한 헌재가 헌재법상 심판정족수 7명 조항의 효력을 정지하는 가처분 신청을 인용한 뒤에야 심리가 진행됐다. 민주당의 몽니는 제 발등을 찍는 결과로 이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을 선포해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의결했으나 재판관이 6명뿐이어서 비상이 걸렸다. 민주당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한덕수 국무총리에게 재판관 3명을 임명하라고 압박하다 관철되지 않자 한 총리의 탄핵안을 의결했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재판관 2명을 임명하면서 헌재는 정상화했으나 지난 5개월의 국정 혼란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현 정부 들어 민주당이 탄핵을 강행한 인사는 이 위원장뿐이 아니다. 네 명의 탄핵이 기각돼 직무에 복귀했지만, 한 총리와 최재해 감사원장 등 9명은 여전히 직무정지 상태다. 민주당의 무분별 탄핵은 윤 대통령의 계엄령 오판 배경으로도 작용했다. 계엄 직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고공행진하던 민주당 지지율이 시간이 갈수록 추락해 국민의힘과 역전 현상까지 나타난 데에는 ‘묻지 마 탄핵’의 영향도 클 것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어제 기자회견에서 “이념과 진영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놓곤 최상목 권한대행을 향해 “권한 행사 기준이 오락가락”이라고 날을 세웠다. 이러다 민주당의 ‘탄핵병’이 또 도지는 건 아닌지 국민은 불안하다. 야당이 강행한 정략적 탄핵소추는 대통령의 무모한 정치적 오판과 결합해 정국 불안의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여권의 책임도 크다. 5명이어야 할 방통위 상임위원을 ‘2인 체제’로 운영해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아무리 선출된 권력이라도 민심을 무시하고 독주하면 국민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나 야나 깨달아야 한다.

2025-01-23

[중앙시평] 대한민국은 ‘필사적 결단’이 절실하다

지금 대한민국의 최중요·최우선 과제는 무엇인가? 존망의 기로에 선 나라의 물줄기를 확고히 돌리는 일이다. 아니, 이미 존망의 기로를 넘어 점점 망해가고 있는 나라를 다시 살리는 일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대한민국이 소멸국가를 넘어 자멸국가로 치닫고 있다고 호소한 바 있다. 최근의 사태 전개를 보면서 우리는 자멸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음을 목도한다. 인류국가의 흥망의 역사를 돌아볼 때 깊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우리는 이 정도였는가? 대한민국의 정점(Korea peak)은 여기까지인가? 나라 망해도 살아날 진영은 없어 무력적·폭력적 내전 직전의 상태 타협·공존 헌정체제로 도약 필수 여야 같은 수로 헌법특위 구성을 자문해보자. 대체 왜 이리 사생결단식으로 갈등하는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무력과 폭력을 불사하면서까지 권력유지와 권력탈취에 매달리는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미래, 오늘의 민주주의와 법치는 망하더라도 내 진영과 내가 지지하는 인물의 집권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자멸의 각오와 공멸의 독선이 아니라면 지금의 반이성적 반공화적 행태는 설명할 수 없다. 나라가 망해도 살아남을 수 있는 진영은 없다. 민주화 초기 ‘남남갈등’ 담론을 처음 제기할 때, 그 의도는 남북문제가 국내갈등의 근원으로 작용하는 오도된 이념현상을 지적하려는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는 더욱 나빠졌다. 진영 적대의 악화, 정치의 극단적 양극화와 함께 사용한 언어는 ‘남남내전’이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남남내전은 한국정치와 사회의 현실일 뿐만 아니라 최중심 현상이 되었다. 처음에 각자의 마음속에서 시작된 심리적 내전은 점차 공공 영역의 언어적·정치적 내전을 거쳐 법적 내전 단계에 돌입하더니 어느덧 신체적 내전 상태에 성큼 들어서 있다. 신체적 내전은 몸을 무기처럼 사용하여 최대한 ‘전쟁 현장’(‘전쟁’은 현재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진영 언어이자 내면 진단이다)으로 달려가서 강렬한 전의(戰意)와 점령 면적과 세력 강도를 보여주는 투쟁상태를 말한다. 무력적·폭력적 내전 직전 상태다. 지금 남남내전은 심리적·언어적·정치적·법률적 단계를 지나 신체적 단계이며 폭력 사용 직전, 또는 준(準)폭력단계에 돌입해있다. 그러나 한때 동반자였으나 지금은 상호 적대하는 두 진영을 대표하는, 적폐 청산과 검찰 정권을 주도한 두 사람이 모두 구속된 현실은 남남내전의 허구와 실상, 표층과 심층을 그대로 보여준다. 군사력을 동원한 통치의 시도처럼 남남내전의 상태를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미중대결을 포함해 지금은 세계 대변동의 한복판이다. 함께 혼신의 힘을 다해도 버거운 시점이다. 지금 나라가 길을 잃은 이유는 단연 정치가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갈라져 다투는 나라를 구할 외부 요소는 결코 없다. 대한민국 헌법1조이자 근대 인류 공통의 위대한 고안물인 ‘민주공화국’은 ‘민주정’의 주권·자유·경쟁·갈등과 ‘공화국’의 타협·공존·연대·통합의 결합이다. 군주정·귀족정에 비해 최단명 국가체제였던 민주정이 인류역사에서 보존성과 영속성을 갖게 된 것은 공화국과 만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비록 민주정일지언정 공화국은 실종되었다. 악성 체제와 악성 정치로 인해 국민들 역시 두 진영의 진민(陣民)으로 갈라지고 있다. 공화국(republic)의 동등한 자유민(freedom)이 아니라, 진영지도자를 부족장이나 군주처럼 추종하는 부족과 군주국(kingdom)의 예종민(serfdom)처럼, 진영의 자발적 진민과 예종민으로 역진하고 있다. 어떻게 넘을 것인가? 두 겹의 결사적 도약(salto mortale)에 길이 있다. 하나는 타협과 공존의 정치가 가능한 헌정체제로의 결사적 도약이고, 다른 하나는 두 진영 진민의 공화국 시민으로의 결사적 도약이다. 결사적 도약은 주체와 객체의 본질과 가치가 비약적으로 전환되는 단계와 순간을 말한다. 그만큼 기존의 본질 및 가치와 절연하려는 자기 투쟁이 필수다. 대한민국은 이 두 겹의 결사적 도약이 아니고는 자멸의 물줄기를 돌리기가 결단코 쉽지 않다. 그 첫 시작은 헌정체제의 대개혁이다. 특히 제1당(야당)과 제2당(여당)이 함께 동등한 숫자로 의회에 헌법개혁 특위를 구성하여, 승자독식과 국정단절, 진영대결과 남남내전을 극복하는 새 헌법을 만드는 일이다. 나라의 근본 토대인 새 헌법에의 타협은, ‘나라를 함께 만든다’는 헌법이라는 말 그대로,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의, 그리고 새 민주공화국으로의 빛나는 결사적 도약이 될 것이다. 새 헌법 논의의 시작 자체가 현재와 같은 상대 진영 타도가 아니라 새 나라, 새 미래를 ‘함께’ 만들겠다는 결단이다. 특위를 여야 동등한 숫자로 구성하는 것 역시 타협과 협치를 위한 도약이다. 합의를 통해 새 헌법과 새 나라 만들기에 성공했던 단 두 번의 경험이었던 4월혁명 및 6월항쟁 때 여당은 압도적인 의석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길을 갔다는 사실을 오늘의 제1당이 명심해야 한다. 대표와 정당들이 결사적 도약을 이룬다면 지금의 진민들 역시 똑같은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함께 환영할 것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2025-01-23

[강주안의 시시각각] 계엄 우두머리는 김용현 전 장관?

윤석열 대통령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사이의 민망한 신경전이 드디어 끝났다. 공수처가 어제 사건을 검찰에 송부하면서 진실 규명은 검찰 몫이 됐다. 이쯤에서 수사와 탄핵 상황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공수처는 두 차례에 걸친 체포영장 집행 시도 끝에 윤 대통령의 신병을 확보했다. 법원의 체포 적부심과 구속영장 실질심사의 벽을 넘었다. 거기까지였다. 이후 공수처는 성과물을 얻지 못했다. 윤 대통령은 조사를 거부했다. 공수처는 윤 대통령을 강제 구인하겠다며 서울구치소를 찾아갔다. 윤 대통령은 방문조사조차 거부했다. 헌법재판소 변론에 직접 출석해 열변을 토하는 윤 대통령을 보면서 공수처는 속이 쓰렸을 테다. 검사 출신인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공수처는 실력이나 능력이 형편없다”고 했다. 공수처, 끝내 윤 대통령 조사 못해 윤·김, 헌재 나와서 검찰 수사 반박 포고령도, 쪽지도 김용현 작성 주장 검찰이 수사에 들어가면 윤 대통령이 묵비권을 행사할 순 있어도 조사 거부는 어렵다는 예상이 나온다. 한 전직 검찰 간부는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하면 수사기관은 강제 조사할 권한이 있다”며 “피의자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일단 조사실에는 와야 한다”고 말했다. 조사받기 싫다고 구치소에서 버티는 게 일반인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20여 년 검사 생활 동안 구속영장 기한이 남은 피의자가 거부한다고 해서 구치소에서 검찰청 조사실로 데려오지 못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공수처도 윤 대통령을 체포한 날엔 오후 9시40분까지 영상녹화조사실에 있도록 했다. 이후론 마주 앉지 못했다. 비록 윤 대통령이 공수처 조사에 불응했지만 헌재 발언과 페이스북 글을 통해 앞으로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내놓을 주장의 윤곽은 나왔다.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대목은 곽종근 당시 특수전사령관 등이 증언한 “의원들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부인한 점이다. 여러 명이 비슷한 진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공소장에 담긴 검찰 수사 내용과도 상반된다. 한 전직 검찰 간부는 “만약 윤 대통령이 의원들을 끌어내라고 했다는 사실을 시인하면 곧바로 ‘의원들을 벙커에 구금하려 했느냐’는 식의 질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며 “첫 단계부터 부인하는 게 피의자로선 차라리 편하다”고 분석했다. 어제 헌재 변론에서도 김용현 전 장관은 포고령 1호 작성과 비상입법기구 쪽지 등 핵심 내용을 자신이 했다고 주장했다. “의원”이 아니고 “요원”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검찰 수사 내용부터 대폭 수정이 불가피하다. 계엄을 주도한 사람은 김 전 장관이고, 윤 대통령은 제한된 역할을 했다는 얘기인가. 내란죄는 역할에 따라 형량 차이가 크다. 우두머리는 사형과 무기형뿐이다. 하한이 금고 5년형인 ‘중요 임무 종사자’에 비해 처벌이 무겁다. 다만 김 전 장관이 주역이 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있다. 군경 지휘관이 일제히 윤 대통령에게서 의원 체포 지시를 받았다고 입을 맞췄다면, 수사기관의 회유를 의심해야 한다. 그런데 내란죄 피의자가 아닌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까지 윤 대통령이 “싹 다 잡아들이라”는 지시를 했다고 국회에서 증언했다. 회유당할 이유가 없는 홍 전 차장이 형사처벌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위증할 동기는 아직 설명되지 않는다. 이제 윤 대통령 측이 홍 전 차장의 증언을 어떻게 반박할지, 검찰이 계엄의 주동자를 누구로 판단할지가 관건이다. 가장 큰 걱정은 앞으로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서부지법 난동 사태가 재현될 가능성이다. 부산고검장을 지낸 양부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앞으로 검찰이 기소하고 헌재와 법원에서 재판을 진행할 때마다 비슷한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커졌다”며 “검찰과 법원이 철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염려한다. 법원·검찰·공수처 모두 자체 방어 인력이 부족하니 경찰 보호 없이는 사법기관이 버틸 수 없는 나라가 돼가고 있다. 윤 대통령이 대선 때 약속했던 것처럼 경찰청장을 장관급으로 격상하고 경찰 인력을 대폭 늘려야 할지 모르겠다. 강주안(jooan@joongang.co.kr)

2025-01-23

[주정완의 시선] 보안사 고문 피해자 정규웅을 추모하며

“고문실은 암흑이었다. 다만 천장 네 귀퉁이에 붉은 전구가 희미하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첫 고문은 천장에서 내려진 밧줄에 두 팔을 꽁꽁 묶은 뒤 공중에 들어 올려 이리저리 흔들면서 몽둥이세례를 퍼붓는 것으로 시작됐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정규웅 전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이 생전에 남긴 국군 보안사령부(현 방첩사령부의 전신) 고문실의 기억이다. 전두환 정부가 출범하고 비상계엄을 해제한 지 4개월 정도 지난 1981년 5월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중앙일보는 한수산 작가의 ‘욕망의 거리’라는 제목의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다. 영장 없는 체포, 고문 도구 준비 44년 전과 12·3 계엄 닮은꼴 반성 없는 역사는 되풀이되나 보안사 요원들은 소설의 일부 표현을 문제 삼아 한 작가와 중앙일보 기자 세 명, 출판사 편집자 두 명을 악명 높던 서빙고 분실로 끌고 갔다. 이른바 ‘한수산 필화사건’이었다. 영장도 제시하지 않고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도 고지하지 않은 불법 연행이었다. 당시 보안사령관은 신군부 2인자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었다. 정규웅 전 부장도 그때 고문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1980년대 글동네의 그리운 풍경들』)에서 이렇게 적었다. “두 사병이 각목을 들고 가세해 부인하거나 대답을 하지 않으면 몽둥이세례를 퍼부었다. 잠시 양쪽 바지 자락을 들어 올리니 온통 시꺼멓게 죽어 있었고 곳곳에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보고서를 보면 과거 보안사가 문제 삼은 부분은 사실 별것도 아니었다. 정부 고위관리가 ‘촌스러운 모자’를 쓰고 탄광촌을 찾았다가 돌아가는 길에 주민들과의 대화 내용을 다 잊어버린다는 부분과, 교통경찰 제복처럼 디자인한 회사 경비원 제복을 언급하며 군인 등 제복 좋아하는 사람을 풍자한 부분이었다. 이중 앞부분은 ‘국가원수의 헤어스타일(대머리)’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정의사회 구현을 위한 대통령의 열정과 노력’을 무력화하려는 의도로 간주됐다. 뒷부분은 군 장병을 모욕하고 비하해 북한에 동조하는 이적 행위를 저질렀다며 ‘빨갱이 딱지’를 붙였다. 그때도 헌법에는 언론·출판의 자유와 예술의 자유가 명시돼 있었다. 하지만 보안사 요원들의 끔찍한 고문 앞에서 헌법 조항은 아무런 힘도 갖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한수산 작가는 “벌레가 되어 나는 다시 제주로 내려갔다. 그리고 벌레가 되어 살았다. 벌레도 산다”고 자신의 책(『용서를 위하여』)에 적었다. 자신을 벌레에 비유할 정도로 비참함과 절망감에 괴로워했던 작가의 심정이 느껴진다. 44년 전에 있었던 보안사의 불법 고문은 다시는 되풀이돼선 안 될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과거다. 그런데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태는 참혹한 과거의 트라우마를 되살아나게 했다.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의 증언은 충격적이다. 그는 지난 22일 국회 국정조사특별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비상계엄 당시 상황에 대해 진술했다. 홍 전 차장은 계엄 당일 윤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이번에 다 잡아들여서 싹 다 정리해라. 방첩사령부를 적극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처음엔 간첩단 사건인가 생각했지만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에게서 체포 대상자 명단을 듣고 나서 정치인 체포 지시였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여 전 사령관이 불러준 명단에는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우원식 국회의장 등 14명이 있었다는 증언이다. 노상원 전 국군 정보사령관이 이른바 ‘부정선거’를 밝히겠다며 고문 도구를 준비하라고 지시한 정황도 군 검찰의 수사에서 드러났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1월 ‘햄버거집 회동’에서 문상호 당시 정보사령관 등에게 “야구방망이·케이블타이·복면 등도 잘 준비하라”는 지침을 준 것으로 군 검찰은 파악했다. 그러면서 “일단 체포 관련 용품을 구입해오면 내가 돈을 주겠다. 장관님(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지시이니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군 검찰의 공소장에는 정보사 대령이 알루미늄 야구방망이 세 개와 케이블타이·안대·복면·밧줄 등을 준비했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북한도 아니고 21세기 대한민국 군대에서 실제로 고문 도구를 준비했다는 게 도저히 현실로 믿어지지 않는다. 18년 전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한수산 필화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공개 사과와 보상, 추가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끝내 공개 사과는 없었다. 이번 계엄 사태의 주동자들도 사과나 반성 대신 억지와 궤변으로 어떻게든 법적 책임을 면해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다. 진솔한 반성이 없는 역사는 결국 이렇게 되풀이되는 것인지 씁쓸하기만 하다. 주정완(joo.jungwan@jtbc.co.kr)

2025-01-23

[에버라드 칼럼] 노벨평화상 노리는 트럼프 2기의 대북 정책

트럼프 2기 정부는 아직 대북 정책을 직접 언급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대북 정책에 대해 애매모호함을 유지 중이다. 지난 15일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포괄적 대북 정책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관례적 언급이었다.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에 대한 논의도 없었다. 두 사람의 개인적 친분이 유지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특히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 이후 더욱 그렇다. 양측은 서신 교환도 거의 없으며 오랫동안 서로에 대한 그 어떤 의미 있는 언급도 없었다. 북의 도발에는 덜 관대해지고 중국에 대북지원 중단 압박할 듯 평화상 불발 시 관계개선도 난망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노리고 있다. 2020년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바레인이 정식 외교 관계를 수립한 아브라함 협정을 중재하고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지 못한 사실을 트럼프는 여전히 분개하고 있다. 트럼프의 측근에 따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 종식을 통해 트럼프는 노벨 평화상 수상을 꾀하고 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북한에 의도치 않은 불똥이 튈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더라도 미국의 역할 부재 때문에 한반도에 분쟁이 발생한다면 노벨 평화상 수상의 길목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점을 트럼프는 잘 알고 있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인사청문회에서 의도하지 않은 전쟁의 위험을 낮출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조 바이든 정부 때보다 트럼프 정부가 북한의 도발에 덜 관대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미국이 북한의 무기 개발에 더 직접적으로 대응해 지난해 발표한 북한의 무기 현대화 5개년 계획에도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이러한 미국의 대응 때문에 북한은 대남 도발에 나설 때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노벨 평화상 욕심이 불러올 간접적 영향은 더 심오하다. 루비오 국무장관은 우크라이나의 항구적 평화는 러시아의 양보를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수용할 수 없는 과도한 수준의 요구를 고집하고 있다. 러시아가 현실적 협상에 나서게 하려면 미국은 상당한 압력을 가해야 한다. 물론 직접적인 압력에는 제한이 있겠지만, 러시아가 중국·북한·이란에 의존해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루비오 국무장관이 중국을 전략적 적성국으로 간주하니 트럼프 2기 정부는 바이든 정부 때보다 훨씬 더 강경한 대중 정책을 펼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정부는 북한의 러시아 지원 중단을 위한 직접적 압력 행사가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루비오 장관도 애초에 핵무기 개발 중단에 방점을 둔 강력한 대북 제재를 북한이 견디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는 중국에 압력을 넣어서 북한을 압박할 수 있다. 북한은 러시아에 무기와 장병을 공급하는 대가로 곡물과 석유를 받고 있는데 중국은 이런 북한에 여전히 주요한 원조 제공 국가다. 그렇기에 대러 지원을 북한이 중단하지 않으면 중국이 대북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나선다면 이는 북한에 큰 위협일 수밖에 없다. 과연 중국이 미국의 이런 압력에 응할 것인가. 이는 미국의 제재 위협 강도와 가능성에 달렸다. 의외로 중국이 순순히 응할 수도 있다. 북·러 밀착으로 북·중 관계는 악화했다. 김정은과 시진핑의 소통을 보면 알 수 있다. 푸틴 대통령에겐 구애 공세가 넘쳐나는데 시 주석에 보내는 메시지는 냉랭하다. 최근 북한에서 열린 행사에 중국 측 참석자 규모만 봐도 알 수 있다. 북한의 러시아 전쟁 지원이 중단되지 않는 상황에서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중국이 북한에 압력을 가하면 북한은 큰 딜레마에 직면한다. 중국의 원조든 러시아의 곡물·석유 지원이든 중단된다면 북한의 취약한 경제에 큰 타격을 줄 것이다. 만약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북한은 대러 관계를 포기하고 중국의 원조를 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원조가 없으면 러시아의 무기 지원 요구가 지속할 것이고 북한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우크라이나 전쟁은 지속하고 트럼프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이번에도 멀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북한의 대미 관계 회복이나 미국의 대북 원조 가능성도 더 요원해질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2025-01-23

[최준호의 혁신창업의 길] 연구소기업의 힘, 5000억 규모 치매 신약 기술수출 성사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75〉 큐어버스 조성진 대표 지난해 10월 국내 바이오 스타트업이 이탈리아의 글로벌 제약사 안젤리나파마와 대규모 기술수출 계약을 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치매 치료 후보물질을 기술이전하고, 그 대가로 총 3억 7000만 달러(약 5440억원)를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매출이 일어날 때 로열티는 별도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보도자료를 내고, 대통령실 과학기술수석까지 나서 홍보에 열을 올렸다. ‘대박’의 주인공은 창업한 지 만 3년이 갓 넘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창업기업 큐어버스. 3억 7000만 달러는 임상 3상을 통과하고 상용화까지 이어질 경우 단계마다 순차적으로 받을 수 있는 돈의 총액이지만, 정부 출연 연구소 출신 스타트업의 기술 이전 규모로는 역대 최대다. 창업 후 만 3년 여, 아직 임직원 8명에 불과한 스타트업이 올린 기록으로는 이례적이다. 국내 신약 스타트업의 해외 기술이전 사례가 없는 건 아니지만, 큐어버스가 특히 주목받는 건 국내 출연연의 ‘R&D 패러독스’ 극복의 모범사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대표적 국제학술지 네이처가 인덱스 특집호를 통해 ‘한국은 R&D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지만, 비용 대비 효과는 놀라울 정도로 낮다’고 비판한 바 있다. KIST 신약 후보물질 이전 받아 치매 원인인 염증 없애는 약물 기존 치매 치료는 30%가 한계 3상 완주 글로벌 제약사가 꿈 큐어버스를 이끄는 사람은 조성진(50) 대표와 박기덕(50) KIST 뇌과학연구소장이다. 두 사람은 연세대 생명공학과 학부 때부터 박사과정까지 함께 해 온 동기다. 졸업 뒤 조 대표는 민간기업에서, 박 소장은 KIST에서 경력을 쌓아 올렸다가 창업의 인연으로 다시 만났다. 서울 홍릉 KIST 내에 본사를 둔 큐어버스를 찾아 그들의 성공 방정식을 물었다. 정부 기술 창업 유도사업의 성과 Q : 큐어버스와 KIST는 어떤 관계인가. A : “큐어버스는 KIST의 ‘연구소기업’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큐어버스가 기술이전한 핵심 신약 후보물질은 KIST 뇌과학연구소에서 개발한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KIST의 신약 후보물질에 대한 기술을 큐어버스가 이전받았다는 얘기다. 과기정통부의 창업 유도형 연구개발 프로그램인 ‘바이오스타’ 사업의 결과였다.” (바이오스타 프로그램은 원래 연구자가 소속을 유지하면서 창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다. 기업 경험이 있는 외부 바이오 전문가 조성진 대표가 바이오스타 프로그램을 통해 KIST에 들어와 박기덕 박사와 함께 큐어버스를 공동창업했다. 이후 지난해 6월 바이오스타 프로그램이 끝나면서 조 대표는 KIST에서 퇴직하고 큐어버스의 최고경영자(CEO)로 전환됐다. 창업 이후에도 박 박사는 KIST 연구자로 남아, 새로운 후보물질 연구를 지속하고 있으며, 최근 80명이 넘는 연구자를 이끄는 KIST 뇌과학연구소장이 됐다.) Q : 박 박사도 지분을 가진 공동창업자인데 큐어버스에선 빠져 있나. A : “나(박 박사)는 연구개발이 좀 더 적성에 맞고,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서였다.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는 것과 그걸 더 개발해 임상시험에 들어가고 회사를 경영하는 건 다른 얘기다. 내가 큐어버스로 직장을 옮기면 그간 해온 후보물질 발굴을 더는 못하게 되는데, 그건 회사로서도 이득이 아니다. 개발과 경영은 조 대표가 맡고, 나는 KIST에 남아 계속 새로운 약물을 연구·개발할 수 있다.” 치매 근원 치료에 대한 새로운 접근 Q : 이탈리아에 기술이전한 치매치료 후보물질은 어떤 건가. A : “제약회사들은 그간 알츠하이머 치매의 근본 원인으로 꼽혀온 베타 아밀로이드나 타우 단백질이 뇌에 과다하게 쌓이는 것을 막거나 제거하는 물질을 개발해왔지만, 효과가 그리 좋지 못했다. 베타 아밀로이드를 모두 없애도, 인지기능 개선 효과는 29%를 넘지 못했다. 최근에는 뇌에 염증이 생기면서 베타 아밀로이드가 뭉치게 되고 염증이 더 악화해 치매 증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많이 나오고 있다. 베타 아밀로이드가 발병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란 말이다. 우린 이 점에 주목했다. 염증을 없애 베타 아밀로이드가 뭉치는 걸 정상적으로 돌려놓으면 보다 근원적인 치료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개발한 약물로 동물 실험을 한 결과 탁월한 개선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약물성도 뛰어나다. 그게 지난해 10월 기술수출한 CV-01이다. 지금 국내 임상 1상에 들어간 상태다.” Q : 약물성이 뛰어나다는 말이 효능과 다른 뜻인가. A : “효능이란 건 약을 먹었을 때 인지기능이 개선된다든지 하는 경우를 말하는 거다. 이렇게 효능을 보이기 위해선 약이 몸 안에 들어가 이동과 흡수가 잘 되면서 대사에 대한 안정성도 갖춰야 한다. 이럴 때 약물성이 좋다고 한다.” Q : CV-01 하나만으로 스타트업을 키울 순 없을 텐데. A : “현재 다발성 경화증 치료제를 목표로 하는 CV-02는 미국 임상을 신청 중이다. 이외에도 폐 섬유화와 희귀암 치료를 목표로 하는 CV-03, 퇴행성 뇌질환과 신경계 질환 치료를 위한 CV-04도 자체 개발 중이다.” 차별화된 기술로 투자 혹한기 넘어 Q : 요즘 스타트업 투자환경이 한겨울인데, 투자유치가 어렵지 않았나. A : “왜 안 어려웠겠나. 그래도 차별화된 기술을 인정받은 덕분에 국내 투자사들로부터 2022년 5월 시리즈A로 81억원을, 올해 들어 최근 시리즈B로 253억원의 투자유치를 마무리했다. 애초 시리즈B 투자유치 목표가 200억원이었으니, 목표를 초과한 거다. 지금까지 총 누적투자 유치금액은 340억원이다. 앞으로 한 차례 더 투자 유치를 한 다음, 2027년쯤 코스닥에 상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Q : 임직원이 8명뿐인데, 그게 다 가능하나. 창업 후 기술이전 성과도 아주 빠른 편이다. A : “KIST가 오랜 기간 연구·개발한 성과물을 이전받은 덕분이다. 임직원이 너무 적어 보이긴 하지만 현재로선 파이프라인을 순차적으로 개발하는 거라 큰 무리가 없다. 회사가 KIST 내부에 있다 보니, 실험·연구장비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바이오스타 프로그램 속에 많은 지원이 있어서 적은 인원으로 빠른 성과를 낼 수 있었다.” Q : 회사의 비전은 뭔가. A : “지속가능한 신약 개발회사로 성장하는 거다. 당장은 초기 임상 후 기술이전해 자금을 모으고, 또 새로운 파이프라인을 개발하고 기술이전하는 방식이 불가피하다. 신약 개발을 위해서는 임상 과정만 10년 이상 걸리고, 투자되는 비용도 조 단위라 국내 바이오 스타트업들은 초기 임상 후 글로벌 제약사에 기술이전하는 방식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렇게 성장하다 보면 임상 3상까지 완주할 수 있는 자금 여력이 있는 글로벌 제약회사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오상록 KIST 원장 큐어버스의 기술수출은 KIST가 지향하는 혁신적 연구와 임무 중심의 성과 창출이 결실을 본 의미 있는 사례다. 특히 이번 성과는 출연연 사상 최대 규모의 수출 계약으로, KIST의 원천기술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큐어버스의 후속 신약 파이프라인들 역시 KIST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기술사업화의 모범 사례로 매우 바람직하다. 정보라 스틱벤처스 파트너 큐어버스의 창업자들은 산·학·연에서 오랜 연구 경험을 쌓은 저분자 신약개발 전문가들로서, 신약 후보물질 발굴 역량이 뛰어나다. 이를 바탕으로 글로벌 기술 이전이 가능한 CV-01과 CV-02를 확보하였을 뿐 아니라 후속 파이프라인 확장을 통해 지속가능한 비즈니스모델을 구축했다. 향후 큐어버스가 유니콘기업(상장 전 기업가치 1조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혁신창업의 길’에서 소개하는 스타트업은 ‘혁신창업 대한민국(SNK) 포럼’의 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정합니다. SNK포럼은 중앙일보ㆍ서울대ㆍKAIST를 중심으로, 혁신 딥테크(deep-tech) 창업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단체입니다. 대한민국이 ‘R&D 패러독스’를 극복하고, 퍼스트 무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R&D)에 기반한 기술사업화(창업 또는 기술 이전)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최준호(joonho@joongang.co.kr)

2025-01-23

[신각수의 한반도 평화 워치] 한·일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트럼프 2.0 ‘혼돈의 질서’에 대응하자

트럼프 2.0시대가 막을 열었다.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 세계질서를 이끌던 탈냉전 시대는 저물었다. 2기 트럼프 정부는 미국의 재건에 집중하면서 세계 관여를 최소화하려 한다. 동맹에 대한 배려보다 미국 이익, 다자 외교보다 양자 외교, 가치보다 거래, 세계 질서 유지보다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울 태세다. 돌아온 트럼프는 ‘충성스런’ 참모, 강력한 어젠다, 양원과 사법부 장악을 기반으로 1기 때보다 더 ‘강화된 트럼프 주의’를 추구할 것이다. 미국, 강한 트럼프주의 추구 세계 질서와 안보 혼돈 확대 한·일, 전략 이익 교집합 커 공동 대응만이 미래 담보 미 고립주의에 서방 결속 약화 가능성 트럼프 대통령은 고립주의 외교를 공언했고, 이는 중국·러시아·북한·이란 등 ‘교란의 축’에 맞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유지해야 할 서방의 결속력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우리가 미국발 복합적인 파고를 잘 넘기려면 불확실성에 놓인 한·미 동맹을 확고히 하고, 흔들리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지켜야 한다. 한국과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국가들과 협조를 강화해야 한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한·일 관계는 지난해 사도 광산 문제에서 보듯 여전히 과거사와 감정 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건전하고 안정된 한·일 관계의 필요성은 네 가지 측면에서 우리 외교 안보에 중요하다. 우선 복합 대전환과 다중 위기의 공동 대처 필요성이다. 동북아는 다양한 불안정한 요소를 안고 있다. 핵 무장 완성 단계에 접어든 북한은 우크라이나 파병으로 러시아의 전략적 지원을 확보하며 더욱 호전적이고 모험주의적으로 변했다. 중국은 공세적 외교 안보 정책으로 기존 지역 질서를 흔들려 한다. 지정학적 단층대인 대만, 남중국해, 동중국해에서 위협 지수가 높아지고 있다. 반면, 세력 균형을 맞춰야 할 미국은 트럼프주의로 동맹 체제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22일 열린 미·일 외교 장관 회담이나 쿼드(미·일·호주·인도) 외교 장관 회담에서 각각 한·미·일 협력과 북한의 비핵화 문제가 사라진 게 대표적이다. 이런 때일수록 아시아에서 2개 나라뿐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이자, 미군이 가장 많이 주둔하고 있는 한·일 양국의 협력이 필요하다. 전후 80년간 한·일이 누린 평화와 번영은 자유주의 국제질서 덕분이다. 무역 입국의 공통점을 가진 한·일은 자유무역 유지를 위해 경제적인 분야에서도 파고를 함께 넘어 시너지 효과를 거둬야 한다. 둘째, 경제 안보 분야에서 상호 이익의 극대화가 필요하다는 측면에서도 양국의 협력 잠재력은 매우 크다. 안타깝게도 한·일 양국은 양국 관계가 악화하는 국면에서 그 손실과 기회비용을 냉정히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성장으로 양국 경제의 상호 보완성이 커졌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경제·외교·안보, 지역·글로벌 이슈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긴밀한 협력으로 윈-윈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최근 양국 기업들이 수소에너지 생산·수송·유통·이용 등 종합적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로 한 것은 좋은 예다. 한국의 제조업·마케팅 능력과 일본의 풍부한 자금력·원천기술을 결합해 인프라·자원개발·플랜트 분야에서 제3국 시장을 개척하는 것도 유망하다. 한·일 협력은 필연적 요구 셋째, 지정학적 측면에서 한·일은 자연스런 지역 전략파트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라는 지역 안보 체제와 여러 강대국 간 세력 균형이 정착한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는 중국의 압도적 존재감으로 역내 균형 세력이 없고, 지역(집단) 안보 체제도 없다. 미국과의 지속적 연계와 함께 중층적 지역 협력체를 통해 법치에 기반을 둔 역내 질서를 확립하는 게 한·일 모두에게 정답이다. 이 양대 과제를 추구하는 데 가치를 공유하고 자유주의 지역질서 유지에 공통된 입장인 양국의 협력은 필연적 요구라는 점에서 자연스런 전략파트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양국은 동북아의 안보적 위협에 대응하는 데 있어 일본 내 7개의 유엔사 후방 기지로 연계된 주한 미군과 주일 미군의 통합적 역할을 고려해야 한다. 지난해 캠프 데이비드 합의로 한층 강력해진 한·미·일 협력 체제에서 양국은 한반도와 동북아 안보에 관한 상호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통일 과정에서도 한·일 협력은 중요하다. 핵무장 국가의 문턱에 다다른 북한은 러시아와의 군사협력과 중국의 지원을 뒷배로 해 핵무장의 기정사실화에 나서고 있다. 북한 핵은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재앙이다. 2기 트럼프 정부가 미봉책으로 대북 제재 해제와 부분 핵 군축을 맞바꾸는 ‘스몰 딜’을 막고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대북 공조 체제를 복원하기 위한 한·일 협력이 긴요하다. 또 대북 억지에 있어서도 한·일이 미국의 확장 억지를 강화하는 데 공동보조를 맞춰야 한다. 1994년 제네바 합의 때 경수로 건설 비용을 분담했던 것처럼 북한의 비핵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대북 경제 지원 조치에 일본의 참여도 필수다. 통일 과정에서도 일본은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 데 중요한 파트너다. 또한 통일 후 예상되는 막대한 북한 경제 재건 비용 마련에서 세계 최대 순자산국이자, 아시아개발은행 주도국인 일본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세계 경제는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 전쟁 등은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고 강대국의 지정학적 대결은 강도를 더해 가고 있다. 대외 취약성이 높은 한국은 가치와 전략적 이익의 교집합이 큰 일본과 견고한 전략적 파트너십을 통해 혼돈과 다중 위기를 뛰어넘을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탄핵 정국으로 외교적으로 제약을 안고 있는 한국과 오는 2월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앞둔 일본이 2기 트럼프 시대의 불확실성 대응에 긴밀히 협력한다면 올해 수교 60주년을 맞은 한·일 관계의 미래를 향한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신각수 니어 재단 부이사장·전 주일 대사

2025-01-23

[윤상인의 근대 일본 산책] 쇄국 나선 사절단 태세 급변, 서양 문물 챙겨 귀국

스핑크스의 사무라이들 한일 수교 60주년을 맞았지만 일본은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입니다. 과거사 문제의 매듭도 양보할 수 없지만 상대를 더 잘 아는 일도 중요합니다. 일본의 근대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남긴 여행기와 일기, 문학작품을 통해 ‘현대 일본의 기원’인 일본 근대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살피는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편집자주〉 우등생의 빛과 그늘 서양 제국주의가 기세를 떨치던 19세기 후반의 시점에서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가 서양 대포의 위력에 굴복하여 국토의 전부 혹은 일부를 식민지로 내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궁금해한다. 왜 일본만이 식민지가 안 되었는가? 그들은 어떻게 해서 짧은 기간에 세계열강의 반열에 올랐는가? 조슈·사쓰마의 노선 전환 일본 근대사 가장 극적인 장면 1863년 사절단 박대당했지만 1871년 사절단 대규모 서양 학습 통역 합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수당 털어 지리·역사·경제서 구입 근대일본의 성공 서사는 오랫동안 동서를 막론하고 인구에 회자되었던 ‘근대화의 우등생’이라는 말로 수렴된다. 그야말로 자타공인이다. 그런데 곱씹어보면 이것은 당사자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칭찬일 수도 있다. 먼저 이 말에 배어있는 서양 우월주의를 승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본디 학생의 학습능력이 우수한지 아닌지를 평가하고 가리는 일은 온전히 교사의 몫이다. 그럼 교사는 누구인가? 당연히 일본에 서양문명을 이식한 서구열강이다. 또 한가지 있다. ‘우등생’이라는 말이 반드시 긍정적인 맥락에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주어진 일, 혹은 이미 문제가 설정되어 있는 과제는 높은 완성도로 수행하지만, 틀에서 벗어난 문제는 잘 풀지 못하는 성향이 있다는 선입견이 엄존한다. 20세기 아날로그 시대의 제조 강국으로서 1980~90년대에는 미국을 위협할 정도였던 일본이 디지털 혁명의 급속한 진보에 적응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30년의 장기침체에 빠진 원인을 ‘우등생의 함정’에서 찾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일본이 서양세력의 식민지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유럽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극동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이점에 더해 일본에 위협적이었던 영국·프랑스·미국 등이 때마침 각각 크리미아전쟁·보불전쟁·남북전쟁에 휘말리며 바깥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없게 되었다는 ‘행운’도 뒤따랐다. 1853년 비록 공포탄이었지만 천지를 진동시키는 페리 함대의 무시무시한 대포 앞에 쇄국 노선을 포기한 에도 막부는 1854년 미국과 수호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에게 항구를 개방했다. 일본으로서 서양의 위협에 대비할 수 있는 약간의 시간을 벌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일본 각지에서 불평등 조약을 맺은 막부에 대한 반발이 거세졌고, 강경파들은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외쳤다. 당황한 막부는 1862년과 1863년, 두 차례에 걸쳐 외교사절단을 유럽에 파견했다. 1차 견구(遣歐)사절단은 지방 2개 항구와 도쿄·오사카의 개방연기, 2차 견구사절단은 공식명칭이 ‘요코하마 쇄항(鎖港) 담판 사절단’, 즉 이미 개항했던 요코하마의 폐쇄 교섭을 위해 파견되었다. 파리에 도착한 2차 사절단은 나폴레옹 3세를 알현, 방문 목적을 설명했지만 결과는 ‘낙장불입’이었다. 국제 외교무대에 처음 등장한 일본은 외국에 이미 약속한 개방을 유보하거나 취소하자고 호소하는 어설프고 미숙한 상대였다. 이런 수구적인 자세로만 보면 일본도 서양 세력의 압도적 무력에 굴복하여 반 강압적으로 불평등한 조약을 맺고 국토의 일부를 침탈당한 여느 아시아 약소국가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교차로에 선 사무라이들 진귀한 사진이 있다. 2차 사절단이 이집트 기자의 스핑크스상을 배경으로 찍은 단체 사진이다. 그런데 어딘지 기묘하다. 세계적인 유적 앞에서 찍는 단체 사진임에도 제대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사람은 반도 안 된다. 석상 목 부분까지 올라가 앉아있거나 타고 온 노새에서 내리지도 않은 사람도 보인다. 원거리여서 인물들의 표정은 살필 수 없지만 어딘지 자신 없어 보이는 자세나 시선에서 피사체들의 위축되고 어정쩡해 하는 심리 상태가 전해지는 것 같다. 당시 이집트의 사막은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탐험의 땅에서 여행지로 변모하고 있었다. 관광객의 거의 대부분이 유럽의 상류계층이었다. 영국·프랑스 등지의 군인들도 단체로 찾았다. 그들은 피라미드를 발굴, 연구하여 이집트 고대유적의 신비를 밝혀낸 서구 근대문명의 후예들답게 낙타나 말 등에 앉은 채 등 뒤의 스핑크스상을 배경으로 득의만면한 미소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대항해시대 이래 이동하고 관찰하는 주체는 언제나 유럽인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가 과거를 해명하고 문명을 전파하며 현재와 미래를 추동하는 유일한 주체라는 확신과 함께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그렇다면 이 사무라이들은 과연 어떤 관광객이었는가? 피라미드에 가기 위해 일행이 숙소에서 마차에 올랐을 때, 사절단은 자신들을 ‘구경’하러 몰려든 수백 명의 인파에 적잖이 시달려야 했다. 관광객으로서 사절단 일행은 분명히 ‘보는’ 주체였겠지만 그와 동시에 엄존했던 인종적·문명적 위계체계 속에서 호기심 어린 시선에 쉽게 노출되는 상대적 약자이기도 했다. 사진 속의 사무라이 집단은 차림새로만 보면 중세에서 곧바로 튀어나왔음직 한 행색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사진이 어정쩡하게 보였던 가장 큰 이유는 사진 속 인물들이 과거에 묶인 채로 과거를 관찰하고 기념한다는 어색함 때문이지 않았을까. 본국 일본은 근대라고 하는 새로운 시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집트 문명의 폐허 앞에 선 사무라이들은 과거의 시간에서 서성거리는 국가의 명운을 뿌연 모래바람 속에서 막막하게 헤아릴 수밖에 없었다. 지면 배운다 이렇다 할 성과 없이 6개월 만에 일본에 돌아온 2차 사절단은 외교 교섭 실패를 이유로 막부로부터 면직되거나 근신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정말 빈손으로 귀국했을까? 사절단의 대표 이케다 나가오키(池田長発)는 당시 27세로 동서의 학문에 능해 막부에서 중책을 맡고 있었던 엘리트였고, 대표적인 양이론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곳곳을 다니면서 유럽 근대문명의 우월함에 압도당했다. 도중에 들렸던 중국과 이집트에서는 고색창연한 과거의 시간에 얽힌 채 서양세력 앞에 무기력하게 굴종하는 모습을 보았다. 프랑스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2차 사절단은 예정되어 있던 영국·네덜란드 방문을 취소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외교성과는 없었지만 마르세유에서 실은 그들의 짐 속에서는 공업·섬유·농업·물리학·생물학에 관한 서적과 측량도, 와인 양조법 같은 자료가 가득했다. 그리고 귀국 직후 이케다는 막부에 개국의 중요성을 진언했다. 양이파였던 젊은 엘리트가 개화파로 변신한 것이다. 이들보다 먼저 1차 견구사절단에 통번역 담당으로 합류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도 나라의 독립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서양 문명을 학습해서 서양을 따라잡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고 깨달은 인물이었다. 그는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그동안 아껴두었던 해외 도항 수당을 모두 털어서 지리·역사·경제 관련 서적을 구입했다. 이 책들이 ‘일본 근대 최대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토대가 되었다. ‘양행(洋行)’은 일본의 근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이다. 막부 말기인 1860년부터 1867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외교사절단을 미국·유럽에 파견했다. 서둘러 근대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춰야 했던 메이지 정부도 출범 4년째인 1871년에 정부 내각의 핵심 장관을 다수 포함시킨 대규모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 11개국에 파견했다. 이 구미회람사절단이 탄 배에는 유학생이 60명이나 승선했다. 따라서 큰 맥락에서 보면 19세기 후반 일본이 사절단을 파견한 대외적 명분은 외교 교섭이었지만 실제 목적은 서양의 근대 문명에 대한 학습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처럼 일본 근대화의 물꼬를 튼 것은 사절단·유학생에 의한 인적 이동이다. 여기에는 국가 예산을 들여 서양에서 초빙한 전문가·학자도 포함된다. 아마도 일본의 근대화와 관련한 역사적 사건 중에 가장 극적인 장면은 일본 열도 남부의 강력한 세력들이 보여준 신속한 태세 전환이 아니었을까. 강경한 양이 노선의 본거지였던 조슈(長州)와 사쓰마(薩摩)가 영·불 해군을 상대로 포격전까지 벌였지만 현격한 힘의 차이만 확인하고 서양의 지식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근대화 노선으로 전환한 것, 적국이었던 영국으로 유학생을 파견한 것이 그것이다. 이 역사의 한 단락은 ‘지면 배운다’ ‘명분보다는 실리를’이라는 덕목이 일본인들 사이에 집단 DNA처럼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윤상인=서강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에서 비교문학 전공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근대 이후 한·일 관계를 문학의 관점에서 살핀 『문학과 근대와 일본』을 썼고,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에서 출간한 『세기말과 나쓰메 소세키(世紀末と漱石)』로 인문·사회과학 분야 아쿠타가와상으로 통하는 산토리 학예상을 받았다. 미시마 유키오의 장편소설 『봄눈』 등을 번역했다. 윤상인 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2025-01-23

[김호정의 음악의 세계] 유럽 달구는 ‘예술의 정치 세탁’ 논란

솔직히 베를린 필하모닉도 이렇게 연주하지는 못했다. 베네수엘라의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2008년 내한에서 던진 충격이었다. 이들의 주특기 연주곡인 번스타인의 ‘맘보’를 듣고 청중은 어안이 벙벙했다. 베를린필을 비롯한 많은 악단이 연주했던 곡이지만, 이들처럼 연주자들이 “맘보!”를 목청껏 외치고, 악기를 하늘로 치켜들어 연주하며 이리저리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보란 듯이 춤을 추지는 않으니 말이다. 에너지와 기쁨이 터져 나오는 무대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했다. 이 오케스트라는 이제 이름에서 ‘청소년’을 떼어냈다. 단원 중에 더 이상 청소년이 없기 때문이다. 시몬 볼리바르 심포니 오케스트라 오브 베네수엘라(SBSOV)로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맘보!”의 끝내주는 함성을 들을 때는 예상할 수 없었던 무겁고 어두운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각광받는 지휘자 두다멜 투어 “독재자가 키운 악단” 잇단 비난 예술의 침묵 두고 해묵은 논란 이들은 지금 유럽에서 공연 중이다. 이달 11일 파리에서 시작해 베를린 등을 거쳐 25일 마드리드에서 끝나는 10회 공연의 화려한 일정이다. SBSOV를 만든 베네수엘라의 음악 교육 프로그램, 엘 시스테마(El Sistema) 50주년을 기념하는 투어다. 엘 시스테마는 사회의 빈곤층 아이들에게 대대적인 악기 교육을 무상 제공한 베네수엘라의 자랑스러운 사업이었다. 지금도 참가자가 100만 명 이상, 오케스트라는 1700여 개가 운영되고 있고 많은 나라가 이 이름을 딴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LA필의 현재 상임 지휘자이며 2026년부터 뉴욕필을 맡게 되는 수퍼스타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44)이 여기에서 배출됐다. 오랜만에 친정 오케스트라에 돌아온 두다멜이 함께 하고 있는 투어의 축제 분위기에 한 피아니스트가 찬물을 끼얹었다. 베네수엘라 태생의 피아니스트 가브리엘라 몬테로(55)다. 몬테로는 “이 오케스트라는 부정한 정권의 예술 세탁 수단”이라고 주장했고, 유럽의 공연장과 공연 주최사에 오케스트라와 협력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마침 이달 10일 니콜라스 마두로가 세 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다. 같은 좌파 성향의 이웃 나라도 마두로를 인정하지 않는 부정 선거, 야당 인사와 언론인에 대한 체포로 나라는 혼란스럽다. 엘 시스테마는 재정의 3분의 2를 국가에서 지원받고 있으며 대통령실이 운영한다. 베네수엘라 정부의 부정을 이 오케스트라가 왜곡하고 포장한다는 지적이다. 어려운 문제다. 한 포퓰리즘 독재 정치인의 횡포가 오케스트라의 차이콥스키·말러 교향곡 연주와 관련이 있을까? 지휘자 두다멜이 베네수엘라 정부를 대표하는 것도 아닌데, 이 일과 관련해 사과를 해야 할까? 예술가들이 정치적 상황과 관련해 반드시 발언이나 행동을 해야 하는가? 실제로 이들을 초청한 유럽의 분위기도 엇갈린다. 더 타임스는 공연에 대해 매섭게 질책했고, 가디언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고개를 높이 들고 연주하라”고 응원했다. 여기에서 기시감이 든다. 2017년 이후 예술계에 몰아닥친 미투 사태 때도,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예술가들에 대한 음악계의 퇴출 때도 비슷한 난감함을 겪어 봤기 때문이다. 예술은 예술로, 뛰어난 음악가들 또한 그 자체로 향유하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무엇보다 자신이 하지도 않는 일로 비난받기에는 그들의 예술성이 너무 뛰어나다는 찜찜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세상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안다. 예술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홀로 숭배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수치심을 준 예술가의 작품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푸틴 정부와 확실한 선을 긋지 않고 관계를 유지한 러시아 예술가들은 무대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 경향은 지금도 뚜렷하다. 두다멜이 지난해 여름 뉴욕에서 베네수엘라 국립 어린이 교향악단을 지휘했을 때 공연장 앞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앞으로도 청중과 관객은 예술가들에게 입장을 요구하고 질문하며 질책할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주장은 피아니스트 몬테로의 결론이다. 몬테로는 더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음악이 사회를 변화시킨다고 계속해서 주장해 왔으면서 음악이 정치적인 선전을 한다는 사실을 간편하게 무시할 수는 없다.” 발언의 의무가 침묵의 권리만큼 무겁다. 김호정(wisehj@joongang.co.kr)

2025-01-23

[글로벌 아이] 베이징의 대사들

“주권·국경 문제로 동맹과 경쟁한다면, 우리가 주고 싶지 않았던 통행권을 푸틴과 시진핑에게 주게 된다.” 지난 14일 귀임한 니컬러스 번스(69) 주중 미국대사의 직언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그린란드를 사겠다는 시도를 비판하면서다. 하버드 케네디스쿨 교수로 돌아간 번스 대사는 이임 인터뷰에서 3년간 겪은 베이징 근무의 핵심을 이렇게 정리했다. “‘중국의 신뢰를 얻고자 힘을 썼나’, ‘중국을 믿는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내 대답은 항상 같다. 신뢰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을 그들의 행동으로 판단하는 문제다. 그들이 공적·사적으로 하는 말이나 약속은 중요하지 않다. 중국에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를 벗어나 중국의 행동을 판단하고 중국에 행동을 요구해야 한다.” 지난 2023년 말 귀임한 타루미 히데오(垂秀夫·64) 주중 일본대사는 시사 월간지에 8회에 걸쳐 격정의 회고록을 남겼다. 일본 외무성 내 차이나 스쿨의 대부격인 히데오 대사는 ‘전략적 호혜 관계’라는 개념을 만든 주인공이다. 2023년 중일 평화우호조약 체결 45주년 기념식에서 주일대사 출신 왕이(王毅) 정치국위원이 “훌륭한 연설이었습니다. 꼭 전략적 호혜 관계를 재구축합시다”라고 했다는 일화도 기록했다. 그는 “중국과 마주할 때 ‘중국=당’ ‘당=중국’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라”고 조언한다. 시시비비와 다각적인 태도를 주문했다. 제이미 플로크루즈(74) 현 주중 필리핀 대사는 베이징 특파원 사회의 전설이다. 플로크루즈 대사와 중국의 인연은 반세기가 넘는다. 1971년 첫 중국 방문 당시 반공주의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귀국길이 막혔다. 문혁 와중에 농촌으로 내려가 노동을 경험했다. 마오쩌둥 사망 후 덩샤오핑이 대학시험을 부활시킨 1977년 베이징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뉴스위크·타임·CNN의 베이징 특파원으로 활약했다. 2014년 양회에서는 대학 동기 고 리커창 총리에게 직접 질문할 기회도 얻었다. 2022년 마르코스 대통령이 중국대사에 임명하면서 남중국해 영유권 갈등 속에서 국익을 지켜내고 있다. 저서 『클래스 77-내 동기들은 중국을 어떻게 바꿨나』에 생생한 중국 경험을 남겼다. 중국의 5000년 이웃인 한국은 어떤가. 변변한 대사 회고록을 본 적이 없다. 도돌이표·시계추 외교를 반복한다. K 마크를 붙일 만한 대(對)중국 외교를 보고 싶은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신경진(shin.kyungjin@joongang.co.kr)

2025-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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